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샤 자한 (문단 편집) ==== 내치 정책 ==== 일반적으로 샤 자한의 시대는 무굴 제국의 절정이자 황금기로 평가받는다. 단순히 영토 크기로만 따지면야 후임 [[아우랑제브]] 시대가 훨씬 큰 건 맞지만, 경제적, 그리고 사회적으로 안정되고 더 번영을 누렸던 때는 샤 자한의 재위기였다. 아우랑제브가 무리한 확장 전쟁을 벌이느라 세금을 지나치게 많이 걷어 사회가 흉흉해지고 농민 경제가 파탄났기 때문이다. 샤 자한은 굉장히 능력있는 군주였고, 문학과 예술에 관심이 많았던 계몽군주였을 뿐만 아니라 어마어마한 부를 쌓았다. 참고로 '''샤 자한은 당대 세계에서 가장 부유한 인물'''이었다. 경제가 급속도로 발전하고 세수가 급격히 늘어나면서 자연스레 황제의 금고에도 막대한 양의 보물들이 쌓였던 것. [[무굴 제국]]이 [[중국]]의 [[청나라]]를 제치고 '''세계 1위의 경제 대국'''이라는 타이틀을 쥐었던 것도 바로 샤 자한의 시대다.[* 물론 얼마 지나지 않아 1위 경제 대국 타이틀은 뺏겼다. 당시 [[중국]]은 [[명청교체기]]로 한창 혼란스러웠던 탓이 컸고, 명청교체기 이후 중국에는 [[강희제]]라는 역대급 성군이 들어선 반면 샤 자한 이후 아우랑제브가 국고를 파탄내버리면서 무굴 제국의 경제 규모는 감소했다.] 당시 무굴 제국은 [[악바르]] - [[자한기르]] - 샤 자한으로 이어지는 황금기를 누리고 있었고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대제국이기도 했다. 샤 자한은 [[악바르]]에 비해서는 훨씬 [[힌두교]]나 타 종교에 대해 배타적인 입장을 보였다. 하지만 힌두교도들의 행사에 주기적으로 참석하고 그들의 풍습을 인정하는 등 후일 [[아우랑제브]]처럼 극단주의적인 친이슬람 행보는 자제했다. 애초에 샤 자한이 기존에 후계자로 점찍어둔 다라 시코 황자가 악바르처럼 자유주의적인 성격이었던 것을 생각해보면 그가 어떤 자세로 종교 갈등을 대했는지 짐작해 볼 수 있다. 하지만 샤 자한이 악바르에 비해서 뒤로 후퇴한 입장이었던 것만큼은 분명하고, 결과적으로는 이념적으로 열린 제국을 유지하는 데에 실패하며 무굴 제국의 몰락의 시발점을 만들었다는 평가도 있다. 그는 오르차에 있던 힌두 사원들을 모조리 부숴버렸고 76개에 달하는 대사원들을 철폐했다. 반대로 [[메카]]나 [[메디나]]에는 수백만 루피에 달하는 선물들을 연달아 실어보내며 이슬람에 대한 선호를 분명히 했다. 게다가 [[카슈미르]] 지방에서 힌두교도들과 무슬림이 혼인하는 것마저 막았고 힌두교도들에 대한 세금을 이전보다 1.5배 이상 가중하는 등 배타적인 모습을 보이기도 했다고. 100여 년간 이어진 무굴 제국의 경제 발전이 정점을 찍은 게 바로 이 시기다. 상업에 신경을 많이 썼던 샤 자한은 인도의 최고 인기품목이자 특산물이던 직물업에 많은 투자를 퍼부었다. 무굴 제국 시기의 인도는 주로 [[아프리카]], [[아라비아]], [[유럽]], [[중국]] 등 세계 각지로 해상 교류를 진행했는데, 주요 수출 품목은 [[비단]]이나 [[솜]]이었다. 특히 [[벵골]] 지방에서 직물업이 가장 번성했고 [[네덜란드]]와 [[영국]] 상인들은 인도산 비단이나 직물을 못구해서 야단이었다고 한다. 그 외에도 수출하는 품목들은 넘쳐났다. 소금, 마약, 향신료, 향수, 아편, 설탕 등 가지각색의 화물들이 항구들을 들락날락했고 무굴 제국은 유럽 상인들로부터 걷어들이는 관세 하나로 엄청난 수입을 벌어들였다. 이 시기의 무굴 제국은 거의 전세계의 은을 빨아들이는 블랙홀과 비슷한 수준이었는데, 때문에 영국의 특임대사였던 토머스 로 경은 '인도가 유럽의 피를 빨아 제 배를 채우고 있다'라고 불평하기까지 했다. [[인도 제국|불과 100년 후 벌어질 일을 생각하면]] 웃기는 이야기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